어느 날 미술관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은 단지 두세 개의 색면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인물도 사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색들은 마치 보는 이의 마음속으로 스며들듯 조용하고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사람은 그림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습니다. 많은 설명이 없는 그림도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그는 색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내면을 울리는 작가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어떤 해석이나 정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는 이가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게끔 돕는 조용한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일전에 아이와 함께 미술관을 찾았을 때 로스코의 그림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엄마 조금 슬픈 느낌이 들어요."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무엇이 슬펐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죠. 그림 한 점이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는 직감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색으로 감정을 표현한 마크 로스코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아이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팁과 연계 활동까지 함께 안내해드릴게요. 말보다 느끼는 것이 먼저인 예술의 세계,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마주하게 될까요?
마크 로스코 - 색으로 감정을 말한 화가
마크 로스코는 1903년 러시아(현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한 화가입니다. 그는 초기에 인물화나 신화적인 주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점점 형태를 비우고 색만 남기는 방식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내 그림 앞에서 울 때,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해냈다고 느낀다”고 했을 만큼, 그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회화를 지향했습니다.
로스코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두세 개의 커다란 색면이 캔버스를 나누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무제(1954)》와 같은 작품은 짙은 붉은색과 검정, 또는 어두운 자주색과 회색이 겹쳐져 있습니다.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색들이 움직이는 듯 보이고, 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로스코는 이처럼 색의 농담, 경계의 번짐, 캔버스의 숨결까지 세심하게 조절하며 감정의 깊이를 조형화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특히 조용한 공간에서 감상할 때 힘을 발휘합니다. 직접 조명을 줄이고, 벽 가까이에 걸어, 그림 앞에 서면 색이 관람자를 감싸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아이와 함께 로스코의 그림을 감상할 때는 먼저 “이건 어떤 모양이야?”라고 묻기보다는, 그림 앞에 조용히 머물며 스스로 감정을 느끼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색으로 말하는 그림, 보는 감정이 아니라 느끼는 감정
로스코는 명확한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아무런 형상도 없지만 보는 이를 깊은 감정의 상태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특히 작품 속 색은 강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지만, 화면을 가득 채우며 차분하면서도 무게 있는 정서를 전달합니다. 색 사이의 경계는 선명하지 않고 번지는 듯 흐릿한데, 그 흐림이 오히려 감정을 부드럽게 침투시킵니다.
아이들이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서 "이건 슬퍼요.", "조금 외로운 느낌이 들어요."라고 말하는 이유는, 색이 그들의 감각을 먼저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언어보다 감각으로 먼저 반응하죠. 그래서 로스코의 작품은 아이와의 감상에 있어 설명보다 느낌을 나누는 경험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기분이 떠오르니?", "이 색이 너한테 속삭이는 말이 있다면 뭐라고 할 것 같아?" 같은 식의 감정 중심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어요.
또한 색을 단순히 좋아하는 색, 예쁜 색으로 구분하지 않고, 색이 품은 감정과 분위기를 함께 읽어보는 연습은 아이에게 감정 인지와 표현 능력을 확장시켜줍니다. 작품을 보는 일이 감정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경험은,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큐레이터 엄마가 추천하는 색면 감정화 활동
로스코의 작품은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감정 표현 활동으로 연계하기에 정말 좋은 재료입니다. 아이와 함께 로스코 작품을 감상한 뒤, '오늘의 기분을 색으로 말해보기' 활동을 해보세요. 크레파스나 오일파스텔, 또는 색종이로 커다란 색면 두세 개를 만들고, 그것을 도화지 위에 겹치듯 배치하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조금 속상했어."라고 느낀 날이라면 회색과 파란색 계열을 사용해도 좋고, 반대로 "설레고 기뻤어."라고 느꼈다면 주황과 노랑처럼 밝은 색을 써보게 해도 됩니다. 이때 색을 고르게 하면서 "이 색을 보면 네 마음이 어떤 기분을 떠올리게 해?"처럼 색과 감정을 연결하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예쁘게 그리기'가 목적이 아니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해보는 경험 자체가 소중하다는 걸 아이가 알게 해주는 거예요. 때로는 완성한 색면화에 제목을 붙여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조용한 마음, 살짝 울고 싶을 때 같은 제목은 아이의 감정 언어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기회가 됩니다.
로스코가 바랐던 것도 결국 그림을 통해 자기 감정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었겠지요.
그림은 느끼는 것은 곧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림 속 색이 관람자의 감정과 조용히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마음에 남는 것이 더 큰 그림. 아이가 그 감각을 어릴 때부터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예술과 감정의 세계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셈이에요.
큐레이터로서 여러 전시에서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많은 사람들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유독 조용하고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관람객도 자주 보았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그 그림 앞에서는 누구나 설명 대신 감정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아이와 함께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보는 걸 넘어, 나의 내면과 마주하고 감정을 돌보는 연습을 함께하는 시간이 될 수 있어요. 오늘의 감정을 말로 하기 어려울 때, 색으로 표현하는 경험을 선물해보세요. 로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림을 통해 마음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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